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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tory/서평

[서평]"예수로 하나 될 때까지"를 읽고

by 최영덕목사 2021.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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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로 하나 될 때까지 [프랜시스 챈]


모든 관계에는 갈등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기도하고 우리가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는 가장 큰 증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저자의 말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단연 가장 극심하게 분열했다” 그렇다면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의 분열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할까?

항상 프랜시스 첸 목사님의 저서를 읽을 때마다 큰 망치로 가슴 한편을 얻어 맞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가 그의 저서에서 강조하는것처럼 신앙의 뜨뜻미지근함은 없다. 살아있다면 뜨거워야한다. 그 연장선에서 하나됨 역시 우리에게 도전한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과 되고 하나님과 진정한 화목을 누린다면 우리의  입술은 찬양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놓여진 문제 해결을 위해 정신을 팔려 하나님을 은혜를 누리며 찬양하는 시간을 잊어 버린다면 이거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안에 하나되지 못함을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이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이되어야 하고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함에 대해 두렵고 떨림으로 서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서 있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피상적인 교리로만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연합에 대한 하나님 명령에 관심이 없고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우리 안에 바로 성령이 없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일하심은 분명히 열매로 들어나기 때문이다. 예수로 하나됨은 하면 좋고 안해도 그만인 옵션이 아니다. 온전한 연합은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세상을 되살리를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있는 분열의 골마다 연합의 바람이 불어 와야 한다. 그 시작은 우리 스스로를 볼아보며 가슴을 찢는 회개이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영성의 결정체은 사랑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하고 하나님이 내게 허락한 사람들부터 하나님을 이루어가야 한다. 

분명한것은 복음 안에 교회가 하나되지 않으면 우리가 애써 전하는 복음은 아무 영향력이 없다. 뿐만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하나됨이다. 

우리는 하나님 됨을 위해 창조되었고 하나 되도록 구원받았다. 그리고 한몸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원을 보내게 될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연합을 위해 우리의 온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교회의 분열속에 갈등하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추천합니다. 


<12쪽 중에서> 
내가 교회안에 문제를 해결하는데만 정신이 팔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건너뛸 만큼 어리석다면 교회안에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 투성이다. 
  
<13쪽중에서> 
가장 가슴 아픈것은 우리 주님은 우리의 분열을 끝내시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우리에게하나가 되라고 명하시며, 우리가 그렇게 될때에야 비로소 세상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34쪽 중에서>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절망적으로 보인다. 물론 하나가 되어 보겠다고 초교파 행사도 열고 공동 교리서도 발간하고 심지어 연합을 위한 기도회도 마련한다. 하지만 뿌리까지 들어가 근본 문제를 다루지 않으니 이 모든 방법이 무용지물이다. 우리는 신학이나 방식의 차이가 문제라고 생각해서 여러 성경 구절을 놓고 끝없이 입씨름을 벌인다. 상대편이 우리의 의견 쪽으로 돌아서야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교회의 분열은 훨씬 더 깊은 문제에서 비롯했다. 서로 상충하는 욕심(약 4장),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낳는 질투심과 이기적 야망(약 3장),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미성숙한 믿음이 문제의 뿌리다. 신자임을 자처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연결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적으니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적을 수밖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계적이거나 아예 끊어져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하다. 사랑이 피상적이면 사소한 의견 차이 한 번으로도 서로 등을 돌리고 삿대질을 해 댈 수밖에 없다.. 
  
<67쪽 중에서> 
요한일서 곳곳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 서 행동의 변화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자들은 다 거짓말이라 고 경고한다. 행함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다고 확신해 온 모 든 사람이 이 구절을 읽고 경각심을 느껴야 한다. 사람이 구 원을 받으면 삶이 변해야 할까? 이 질문을 생각하며 다음 구 절들을 읽으라. 
  
<70쪽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와 그분의 사랑을 채워 주시고, 우리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그분의 생명을 부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삶이 변하는 경험을 하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자연스레 넘쳐 난다. 반대로 툭하면 분열을 일으키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향한 사랑이 잘 솟아나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성령이 정말로 내 안에 들어오셨는가?” 
  
<74쪽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정말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이 삶의 변화를 낳는 다는 말도 사실이다. 믿음이 진짜라면 삶의 변화도 진짜로 나타나야 한다. 
  
<74-75쪽 중에서> 
미지근한 이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 이것을 강조하는 까닭은 자신의 신앙이 미지 근하다고 무심코 혹은 농담조로 말하는 사람을 너무도 많 이 보았기 때문이다.   
  
<81쪽 중에서> 
성화는 실제로 긴 과정이다. 하지만 성화를 항복과 동일시하면 문제가 생긴다. 성화의 결과 우 리는 더 온전하고도 기꺼이 항복할 수 있다. 하지만 항복이 성숙의 증거일 뿐 구원의 필수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84-85쪽 중에서> 
믿음이 약한 신자와 강한 신자, 이제 막 신앙의 길에 들어선 신자와 오래 신앙생활을 해 온 신자 사이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연합이 나타날 수 있고 또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서로 밀고 끌어 주는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과는 연합할 수 없다. 물론 사랑 안에서 그들을 질책하고 더 높은 삶으로 부를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면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진리의 기준을 낮추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92쪽 중에서> 
심판은 모든 인간에게 가장 두렵 거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심판을 거 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 몇십 년간 사탄이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심판에 대한 경각심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심판 의 날을 경고하는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적은 언제 인가? 
  
  
<95쪽 중에서> 
많은 교회가 목적 없는 가정처럼 존재의 이유를 망각하 고 있다. 그 교회들은 잃은 양들의 울음소리보다 교인들의 불평에 더 귀를 기울인다. 지옥으로 향하는 사람들보다 다 른 교회로 떠나는 사람들을 더 안타까워한다. 메시아를 거 부하는 사람들보다 우리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속상 해한다면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97쪽 중에서> 
때로는 교회들의 연합이 불가능한 꿈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해 보이는 목표들을 추구한다. 온 교회가 하나가 되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런 연합은 여전히 너무도 멀게만 보인다. 그래서 불신자들의 관심을 끌 다른 방법들을 찾는다.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이런 사고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이는 사울이 저질렀던 죄만큼이나 위험해 보인다. 사울은 그 일로 왕좌를 잃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101쪽 중에서> 
내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부지불시간에 하나님의 명령 을 무시하고 인간의 논리를 내세우는 위험천만한 습관에 빠 져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110쪽 중에서> 
 이 하나 됨은 그분의 기 도 제목이었다. 이 하나 됨은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 니다. 우리를 원하셔서 방법을 찾으신 하나님이 또한 세상 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연합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하나로 묶을 방법을 찾으시 리라 믿을 수 있다. 
  
<112-113쪽 중에서> 
사명에 시선을 고정하고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 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물론 무엇보다 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고린도전서 12장 에서 바울이 말하는 요지다. 즉 성 령은 ‘교회 전체’에 은사와 능력을 분배해 주신다. 따라서 연합이 흐트러지면 우리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고, 그렇게 되면 사명을 완성하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124-125쪽 중에서> 
나는 40년 전에 배운 신학의 기본을 지금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따로 시간을 내 매일 홀로 성경을 읽는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나는 내 침례교 뿌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탐구하지 못한 주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배울 시간을 내지 않고 그저 처음 배운 것만 옳다고 고집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가 모든 주제에 관해서 진리를 찾기 위한 여정에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이 여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며 나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묻고 싶다. “내가 얼마나 확신해야 하는가? 100퍼센트? 90퍼센트? 아니면 51퍼센트?” 내가 풋내기 시절 100퍼센트 확신했던 교리들 가운데 지금은 의심이 가는 교리들이 적지 않다. 나이를 먹을수록 무엇에든 100퍼센트 확신한다는 말을 삼가게 된다. 내가 확신하는 몇 가지 사실은 내가 뭐든 “부분적으로” 안다는 사실이다(고전 13:12). 그래서 늘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127-128쪽 중에서>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진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 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교만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모든 깃을 안다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믿을 수 있 다.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교단들의 신념은 아무린 근거가 없다고 멋대로 판단해 버 리고 나서 시각이 다른 사람과는 아 예 대화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유의 교만은우리 귀를 닫아 진리의 성령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하나 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므로 가장 교만한 사람의 시각이 가장 정확하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130쪽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망각해 왔 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교만의 문제가 곪아 터지기 직전이 다.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모두 불완전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저마다 하나님 에 관한 자신 의 의견이 옳다고 우기고 있다. 겸손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 됨에 이를 수 없다. 더 중요한 사실은,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 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139-140쪽 중에서> 
경건한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님을 자랑한다. 어떻게 예수님을 경험했고 그분 안에서 기쁨을 찾았는지 이야기꽃을 피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감격을 안고 자리를 파한다.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분을 더 열심히 찬양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찬양이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자랑할 거리가 끝이 없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만나기만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설교자들이 말씀을 얼마나 잘 전하는지를 자랑한다.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보면 거의 교회나 예배 팀 밴드, 학교, 신학자, 책, 노래, 교단, 사역, 정치, 목사, 싱어들 등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그러다 결국 누구의 성경 해석이 가장 정확한지, 누가 가장 지혜롭고 똑똑한지, 누가 기름부음을 받았는지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다. 좋아하는 리더를 선택하면 다들 그를 예배하는 섬으로 들어간다. 그 순간, 다시 연합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리더나 신학에 관해서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모였으니까 말이다. 자기 리더의 강점과 다른 진영의 약점에 관해서 모두의 생각이 완벽히 일치한다. 
그 섬에 머무르는 한 화합을 누릴 수 있다. 최소한 섬 안에서 누군가가 새로운 의견을 내놓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모아 다른 섬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그렇다. 
  
<141쪽 중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문제점만을 보며 그렇게 문제가 많은 사람과 같이 예배할 수 없다고 말할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 는 하나님 이 문제보다 무한히 크시다는 사실을 놓치곤 한 다. 설령 우리가 문제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한 관심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 당하다. 
  
<149-150쪽 중에서> 
제자를 키우지 않아서 성숙해 가지 못하는 신자가 너무도 많다. 그들은 선생이 되지 않고 계속해서 배우는 입장에 머물러 있다(히 5:12). 선생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을 때까지 자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준비를 하기 위해 수업을 받기는 한다. (이 책과 같은) 기독교 서적을 읽고 설교 영상을 열심히 찾아서 듣고 본다. 그것이 성숙의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그들은 참된 성숙의 길을 계속해서 걷지 않고 엉뚱한 길로 빠진다. 바로 지식 습득만을 추구하는 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식은 늘어나지만 겸손은 깊어지지 않는다. 지식으로 머릿속을 꽉 채우긴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비우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성령의 열매의 본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를 키우지 않는다. 그 결과, 자기 삶이 그리스도와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성경에 관해 많이 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성숙한 신자로 여긴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너무도 많다. 그들은 믿음의 발걸음을 떼지 않는다. 복음 전파에 삶을 걸지 않는다. 
  
<153쪽 중에서> 
목회자들에게 이 점을 꼭 명심하라고 촉구하고 싶다. 사 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되 예수님이 하셨던 방식으로 키우라. 말로만 가르친 원칙들을 이제 자신의 삶으로 보이 주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라. 반대로, 하나 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멘토를 찾는 사람들은 지식 이 가장 많은 사람을 찾거나 교실로 달러가지 말라. 본받을 만한 삶을 사는 사람을 찾아 그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대로 따라가라. 
  
<157쪽 중에서> 
서로를 향한 초자연적인 사랑을 온 세상에 보이 주는 성숙한 신자들의 모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 교회에서 '사랑’이라는 요소는 타협할수 없는 것이다. 우 리는 공동체와 제자 훈련을 그것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공하는 부가서비스 정도로 취급할 때가 너무도 많다. 마 치 토핑처럼 말이다.   
  
<162-163쪽 중에서> 
목회자의 역할은 교인들을 하나 됨으로 이끄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논리로만 보면 “사람들은 연합 따위에 관심이 없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 됨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들을 알아볼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따라서 교회 리더십들은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우리는 연합이라는 가장 좋은 길로 가야 한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부담스럽지 않은 환경을 원한다. 배운 대로 꼭 ‘행하지는’ 않아도 되는 환경을 원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을 추구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사람들이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제자 훈련을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두 가지 가장 큰 계명을 자주 잊어버린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둘째,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마 22:36-40). 제자 훈련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이런 계명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이 또 하나 있다. 이 계명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168쪽 중에서> 
사랑이 있다면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과연 예수 님이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설명하셨을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았다. 예수님의 사랑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우리는 말하는 기술을 다듬으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마음의 변화를 위해 애써야 한다. 
  
<188쪽 중에서> 
요한일서의 내용이 기억나는가? 우리를 하나님의 진정 한 자녀로 만들어 주는 것은 정확한 교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느냐, 그분의 계 명을 지키느냐,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주변 사람들에게 흘러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석마다 삼삼오오 모 여서 험담을 하기보다는 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눈 을 쳐다보며 관계를 즐긴다면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질 까? 다 함께 잔치를 벌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203쪽 중에서> 
 주권자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대 에 보내기로 선택하셨으니 그분이 강함과 사랑으로 이 상황 을 헤쳐 나갈 은혜를 주실 줄 믿어야 한다. 
  
<220-221쪽 중에서> 
서로가 더 깊은 연민과 희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랑으로 서로 격려하자. 하지만 동시에 다른 신자들이 어떤 일에 우리만큼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시며, 각기 다른 일에 대한 열정을 주신다. 물론 하나님은 그 ‘모든’ 일에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지만 말이다. 나는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당신보다 더 관심을 기울이고, 당신은 인종 화해에 나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또 다른 이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국가에서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나보다 더 걱정하는 식으로 우리는 다 다르다.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어느 것 하나라도 중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모든 것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고 똑같이 참여할 수는 없을 뿐이다. 하나님과 달리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일이 우리와 가장 비슷한 사람들에게만 다가가기가 쉽다. 인생의 경험과 선택, 관심사가 우리와 가장 닮은 사람들하고만 어울리기가 쉽다. 성격이나 의견이 우리와 충돌하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기가 쉽다. 하지만 더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기치 아래 연합하는 공동체야말로 진정 아름답고 강력하다. 그런 공동체는 우리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차이보다 우리의 왕을 향한 공동의 사랑과 충성을 훨씬 더 중시한다는 점을 온 세상에 보여 준다. 말 그대로 천국을 보여 준다. 누구라도 자신의 교만 때문에 이런 공동체를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222쪽 중에서> 
나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시고 하 나 될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보내 주셨다는 사실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하나 됨은 싸움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 어떤 반대에 부딪쳐도 예수님의 분명한 명 령을 따른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229쪽 중에서> 
하나 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당장 큰 규모의 성과를 원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좋은 의도로 그런 것이다. 그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기독교 전체가 부흥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삶이 뒷받침되지 않아 대중에게 전한 메시지가 그 힘을 상실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교회 안에 더 큰 연합이 나타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작은 데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부터 정돈하라. 
  
<231쪽 중에서> 
하나 된 공동체에 관해 한낱 몽상만 품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이다. 대신 우리는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과의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한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연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어디서도 의미 있는 연합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중립적인 태도로 부르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말’을 ‘사랑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모든 대화 속의 모든 문장을 사랑으로 함으로써 더 큰 연합을 이끌어내야 한다. 당신이 가장 최근에 나눈 대화를 돌아보라. 사랑과 연합을 이루는 표현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 
  
<239-240쪽 중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요청한다고 해서 이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줄 안다. 우리 모두가서로 어울리기 위해 더 열심히 노 력한다고 해서 이 연합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줄 안다. 오직성령만이 초자연적인 역사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실 수 있 다. 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길 원하신다고 믿는다. 하나 님이 그분의 교회 안에서 이 연합을 이루기를 원하신다고 믿 는다. 그래서 이 연합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다. 우리는 본궤도에서 꽤 멀리 벗어나 있다. 하지만 하나님 은 고집 센 이 양 떼를 끊임없이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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