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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al letter/믿음의 단상

아내를 아껴주라

by 최영덕목사 2004.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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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아가서).

아내에게로 향하는 우리 사랑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것일 수 있는지 일깨워 주는 말씀이다. 당신은 아내에게 그런 감정이 있는가? 지난 십여 년을 생각할 때 나는 늘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불시에 치르던 시험처럼, 나는 결혼 생활 첫 2년을 생각하면 시험이 떠오른다. 그때 브렌다와 나는 내 본가 식구들과의 문제로 휘청거렸다. 부부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그 즈음 발렌타인데이에 나는 카드를 사러 갔다. 예고도 없이 던져진 시험이었다. 카드를 쭉 넘기며 나는 인쇄된 글귀를 읽었다. 그러나 너무 '감상적'이거나 너무 '낭만적'이어서 하나하나 도로 제자리에 꽂았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가게 안의 발렌타인 카드들 가운데 내가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은 단 한 장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 손실의 깊이를 절감하며 가게를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내 시험 점수는? 기가 막혔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아내를 아껴주고 있는가? 아내의 아껴줌을 느끼고 있는가?

결혼식 때 내가 했던 혼인서약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아내를 무조건 아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야무진 말주변으로 '조건부 계약'을 만들어 나갔다. 아내가 우리 식구들과 화해하고 좋아지면, 그러면 아내를 아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브렌다가 계약의 자기 몫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느껴지자 분노와 원한이 치밀었다. 더 이상 아내를 아껴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더 많은 기대와 요구를 부가했고 결국 계약서는 수많은 조항으로 더 이상 알아 보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잠깐! 내 기대와 다르군. 난 손떼겠어!' 국이 담긴 냄비를 부엌 바닥에 팽개치고, 국물이 온통 쏟아지고, 얼마 지나서 브렌다와 나는 진실의 순간에 맞닥뜨렸다. 아내는 간단히 말했다. "달리 말할 수 없네요. 당신을 향한 내 감정은 죽었어요." 아내는 우리가 이혼을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앞이 아찔했다.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라던 옛날의 공포감이 다시 나를 덮쳐왔다.

며칠이 지났다. 아내의 말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떻게든 해야 했다. 마침내 나는 오른손을 들어 선언하듯 말했다. "하나님, 자갈을 씹어야 한 대도 좋습니다. 이혼만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그때 문득 결혼식 날 했던 서약이 깨달아졌다. 그 약속은 조건부가 아니었다. 아내가 내게 고기와 감자를 먹이면 난 먹을 것이다. 아내가 내게 자갈을 먹여도 난 먹을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내를 사랑하고 아껴주기로 한 약속만은 지킬 것이다. 물론 아내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공유 공간에서 숱한 방식으로 피차 찌르는 것이 우리일진대 초점은 아내의 모난 면이 아니라 나의 모난 면에 있어야 한다. 그 날 이후로 우리 결혼 생활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 내 사무실에는 흑백 확대 사진이 걸려 있다. 브렌다의 한 살 때 사진이다. 빛나는 작은 눈망울은 삶의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장난기 있는 미소가 이미 그때부터 보인다. 붉고 통통한 뺨에는 근심걱정 모르는 환희가 배어 있다. 내가 이 아기 사진을 사무실에 둔 것은 내가 지켜주어야 할 그녀의 희망을 이 사진이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내가 장인에게 브렌다와의 결혼을 청하던 날 그분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간혹 기력이 돌아오기도 했지만 생이 거의 다해가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갈 때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그가 딸을 얼마나 애지중지 사랑하는지 알았다. 딸의 삶이 저속한 것들에 영향받지 않도록 열성을 다해 순결하게 기른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때 그가 한 말은 내 기억 속에 각인돼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다. "내 자네를 잘 모르지만 자기 말에 책임질 남자라는 건 알고 있네. 자네가 이 아이를 잘 지켜 줄 줄 아네."
그는 내 남성성을 믿고 그토록 소중한 딸을 내게 맡겼다. 내 생애 가운데 그렇게 나를 믿어준 사람은 없었다. 천하보다 귀한 외동딸을 주었으니까. 설령 내가 약속을 어겨도 항변할 수 없고, 살아서 사위에게 혼인서약을 상기시켜 줄 수도 없고, 나 때문에 딸의 눈에 광채가 사라져도 자신이 그것을 되살려 줄 수 없음을 다 알면서도 말이다. 그가 나를 믿어 주었기에 나는 그에게 의무가 있다. 하늘나라에서 그를 다시 볼 때 나는 부끄러워 쭈뼛쭈뼛 눈길을 돌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는 내게 배턴을 넘겼고 나는 그것을 들고 끝까지 잘 달릴 것이다.

나는 또 브렌다의 다른 한 아버지에게도 의무가 있다. 그분은 나를 위해 반짝이는 눈과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순결한 "나의 누이 나의 신부"를 예비하셨다. 그분은 그녀를 모태에서 빚으셨고 그녀가 기고 걷고 말할 때 기쁨으로 바라보셨다. 내가 그녀를 아껴주는 마음을 가꾸는 데 소홀할 때 하나님은 좋아하시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그녀를 아끼고 보호하셨듯이 나도 그래야 한다.
나는 남자라 반항 기질이 있다. 때로 삶이 몹시 힘들어지고, 일 때문에 미칠 것 같은 때도 있다. 나는 일정 소득을 올려야 하고 자녀도 부양해야 한다. 사회적 책무와 기타 등등도 감당해야 한다. 때로 내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내 반항 기질이 내 권리와 내 방식과 내 자유를 찾아 절규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작정 차에 올라타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브렌다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 벽에 걸린 아기 사진은 그녀가 언제나 나를 믿으며 언제나 '우리'의 앞날을 위해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늘 내게 일깨운다. 십여 년이 지난 오늘도 브렌다의 눈이 저 아기 눈처럼 빛나기를 나는 원한다. 나는 아내의 아름다움과 기품과 무구함을 꼭 지켜야 한다. 나를 믿고 자신과 자신의 전부를 맡긴 아내를 감히 어떻게 나약한 감정 하나에 맡길 수 있겠는가?

"사랑은 감정이 아니고 헌신이다." 지금이야말로 이 말에 귀기울일 때다. 세상은 감정이 생겨야 행동할 수 있다고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반대로 말씀하신다. "먼저 의지적으로 행동하라. 그러면 감정이 뒤쫓아 올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랑할 것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아껴 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속성의 기초요 근간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무관하게 사랑할 수 있다. 아껴주고 싶은 감정이 없어도 어쨌든 아껴줘라. 감정은 곧 뒤따라올 것이다.

- <모든 남자의 참을 수 없는 유혹>(스티븐 아터번, 프레드 스토커 지음, 좋은씨앗)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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