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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al letter/믿음의 단상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깨우치다

by 최영덕목사 2016.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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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0:1 [개정])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창 20:2 [개정])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네게브는 이스라엘 동쪽 지역으로 뻗어 있는 사막으로 이스라엘 땅의 반을 덮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은 현재에도 사막의 특성 때문에 거주 인구는 극히 적은 땅이다. 

다시 말해 네게브는 거친 땅이다.  그런데 왜 소돔과 고모라 심판 이후에 아브라함과 롯과 갈리지고 나서 근 20여 년간이나 머물렀던 헤브론의 마므레 땅(13:8)을 떠나 네게브로 갔을 까?

뿐 아나라 24년 전 애굽에서 있었던 사건(12:10-20)을 연상하게 만드는 실수를 또 저지르게 된 것일까? 


그는 왜 잘 살고 있는 헤브론을 떠나 네게브로 갔으며 왜 또 사라를 누이라고 또 속임으로 말미암아 아내를 빼앗기는 실수를 저질렀을 까? 

창세기 12에 사건은 근심한 기근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사라는 누가 뭐라 해도 눈에 띌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의 사라는 90세이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90세의 사라는 20 여전의 외모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90세의 할머니를 아비멜렉은 데려온 것인가? 중요한 단서는 아브람의 말에서 있다. 그가 누이라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와 온 지역이 연기와 옹기 가마의 연기로 가득하게 되었다.(창 19:28)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재해이다. 다시 말해 소돔과 고모라뿐 아니라 주변 일대 역시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목자이다. 목자는 풀과 물을 찾아다닌다

그런 측면에서 더 이상 소돔과 고모라 주변에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주는 아브라함의 가족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근에 있는 모든 부족이 이주를 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대대적인 이주를 통해 그랄 왕 입장에서는 정치적 부담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략결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아브라함과 318명의 그의 군사는 그 지역에 소문난 용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멜렉을 두려워하며 비록 90세이지만 누이라고 말하는 사라와 정략결혼을 맺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그를 두려워하며 사라를 누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75세 하나님의 두 번째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났다. 그리고 100세가 되도록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 속인다. 우리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초점을 맞춰야 한다.   


(창 20:3 [개정])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 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 임이라 (창 20:4 [개정])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창 20:5 [개정])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 도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창 20:6 [개정])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 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창세기 20장 3절을 보면 '그 밤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얼마나 급하셨는지 바로 그날 밤에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는 선지지라 선언하시고 너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네가 살 것이라 선언하신다. 

 '선지자'는 '대언자''예언자'를 뜻한다. 그리고 기도는 중재를 이야기한다. 그러한 사명이 아브라함에게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심 사명이다. 아브라함은 세상이 두려워 사라를 누이라 속여 보내는 데, 하나님은 세상에게 아브라함이 너를 위해 기도해야 만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무리 아비멜렉이 세상의 힘을 가지고 있어도 이 땅을 위해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살 수 있다 선언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서 있어야 하는 위치이다.  

이 땅에 정치가 국가의 지도자나 위정자를 통해 이루어지고 전쟁은 군사력을 통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믿음의 사람의 기도를 통해 그 힘이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창세기 20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분을 들어 내신 것이다. 


세상을 아브라함처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주시기 전에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문제를 깨닫게 하신다.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는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복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마지막까지 붙드는 세상적인 그의 마음을 단 하나라도 다 비우게 하신다.  

그가 아무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는 믿음의 분량이라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그 1%까지 비우게 하셔서 온전히 하나님을 100% 순종하고 따르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선지자로 부르셨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세상을 살리시길 원하신다. 그러한 사명이 아브라함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다.  

그럼에도 두려워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이었고 우리였던 것이다. 그러한 우리의 민낯을 보게 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사건이다.  


세상 속에 어떤 존재로 부름을 받았는지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100세라는 소망하는 그 나이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믿음의 분량이 된 것이다. 


그 믿음이 22장에 가서 이삭까지라도 드릴수 있는 믿음이 된 것이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성숙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그렇게 그의 전 인생을 동행하시면 다듬어 가시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들어가 지전에 40년의 광야를 통해 성숙시키시듯 하루하루 동행하는 그 하나님을 알아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선지자다. 우리 역시 선지자다.  그런 선지자가 그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서지 못할 때 수치를 당하게 된다. 다시 말해 교회가 하나님을 놓쳤을 때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동행하면서도 여전히 아브라함과 같이 내려놓지 못한 부분은 없는가?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왕좌의 진정한 주인이고 그 분만을 붙들고 신뢰하며 살아가는가? 


오늘 하루 99%의 순종이 아니라 온전히 100%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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